[잡상] 투표의 역설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을 까발리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쓸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해온 얘기인데 반해 별로 대중적인 논란이 된 적이 없는 이슈입니다. 뭔고하니 "과연 내가 투표하는 것이 선거 결과, 그리고 나의 복리후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라는 문제지요. 이번 대선을 예로 들어서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 내 한 표에 의미가 있을 확률 == 극히 낮다.

이번 대선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A후보를 찍을수도 있고 B후보를 찍을수도 있고... Z후보를 찍을수도 있고, 아니면 잠이나 처자고 투표를 안 할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어떤 후보를 찍든, 또는 기권을 하든, 그것이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을까요?

어차피 대통령 선거는 1위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나머지는 개털인 이벤트입니다. 등수나 지지율이 향후의 정치 풍향에 다소의 변화를 줄 수 있겠지만 그건 아주 미미할 뿐이고, 또 내가 투표를 해서 변할 0.000 003% 정도의 득표율 변화는 그 미미한 효과중에서 또 극히 미미한 부분만을 차지할, 완전히 무시할만한 효과인 겁니다.

제가 누구를 찍든 혹은 투표를 아예 안하든 누가 대통령이 될지, 누구의 정치 주가가 올라갈지는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단 딱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제가 투표하지 않을 경우 1, 2위의 후보가 정확히 동수의 득표를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확률은 극히 드물죠. 여러가지 확률 모델을 세워볼 수 있겠지만 (나름 재미있겠네요) 3천만의 유권자가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상황은 "두 후보의 지지율이 오차 한계 이내"인 경우라도 백만분의 일 미만이라는데 100원 걸 수 있습니다. 이번 대선처럼 더블 스코어라면 확률을 다 쓰기 전에 키보드의 0 키가 먼저 망가지겠지요.


2. 내가 투표를 하는데 드는 비용 == 공짜가 아니다.

투표 한번 하려면 대충 30분 정도는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후보들을 고르느라 고민하는 시간이나 후보들 뒷다마 까느라 블로깅하는 시간같은건 계산 안 한다 쳐도 말이죠. 당연히 시간은 돈이고, 아무도 투표에 사용한 시간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습니다. 전 30분에 한 3천원 정도는 받고 싶은데 말이죠. :)


3. 내가 투표를 잘 해서 얻는 복리 == 별로 안 크다.

1위와 2위가 동률이고 나의 황금의 한 표가 당선자를 결정지었다고 칩시다. "황금의 한 표"를 행사한 사람이 나 말고도 천만명쯤 더 있겠지만 아무튼 그건 논외로 하고요... 그러면 그것이 나와 국가에 어느 정도의 보탬이 될까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왕이나 총통이나 독재자를 뽑는게 아니라 민주국가의 대표자를 뽑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급진적인, 혹은 반동적인 후보자라도 절대군주가 아닌 이상 다른 정치 세력들과 타협을 하면서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XXX 후보를 뽑으면 나라 망한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정말 나라가 망한다면 모든 정치꾼들과 국민들이 책임을 나눠서 져야죠.
허나 분명 유능과 무능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유능한 행정부와 서투른 행정부의 차이를 대충 1년에 10조원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서투른 행정부는 운하를 파거나 뭔가 다른 개똥같은 일을 하는데 5년 50조원을 불태우고 유능한 행정부는 국민의 복리를 위해 그 자원을 사용한다고 치죠. (경부고속철도 예산 약 20조, FX사업비 약 5조...)
50조라는 돈은 물론 천문학적인 돈이지만 국민 1인당으로 나눠보면 나에게 돌아올 복리는 50조/5천만 = 약 1백만원 정도입니다. 있으면 좋은 정도긴 하겠지만 그닥 크진 않죠?


1+2+3. 투표하기 == 확률이 무지무지 낮은 로또 구매

... 그리고 만약 당첨되면 당첨금은 전국민이 나누어 가지는 거죠. 그래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투표할 시간에 잠이나 처자는게 개인의 복리에는 보다 이익이 될 거라는 겁니다.
다만 모든 국민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민주주의가 성립하질 않죠. 그런 의미에서 투표의 역설은 죄수의 딜레마의 또다른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서 (아직도 읽고 계신다면...이지만) 다소 거부감 내지는 불쾌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사실 저도 쓰면서 계속 불편합니다. 우리 어릴때부터 확고하게 형성된 가치관은 "민주주의 == 절대선, 투표 == 민주주의, 그러니까 닥치고 투표"를 외치고 있거든요. 하지만 민주주의가 왜 좋은지, 투표는 왜 해야 하는지, 민주주의와 투표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지, 어느어느 후보가 당선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등등에 대해 저는 쉼없이 의문이 들고, 남들은 정말 그런 의문이 없는 건지 또 의문이 들곤 합니다.

전 물론 나름의 답을 갖고 투표를 하러 갑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해가 졌더라.. 만 아니면 말이죠. ;-)

다들 즐투표 되세요.



by 하얀까마귀 | 2007/12/19 01:20 | Garbage | 트랙백 | 핑백(2)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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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eecheie at 2007/12/19 01:24
네- 저도 투표하러 갑니다 : )

이러저러 말이 많아도 역시 투표는 포기하는 것 보단 하는것이 나을 것 같아요 ^^
Commented by monsa at 2007/12/19 01:28
어떤 결론이든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한 후에 내린 결론이면 그걸로 된겁니다. 투표를 하든 안하든 말이죠.
심각할 필요까지는 없죠. 즐투표!

Commented by Ha-1 at 2007/12/19 02:57
누나 가슴에 있는 돈을 투표로 받으려 드시다니 (...)
Commented by 게드 at 2007/12/19 04:44
투표를 하는 이유는 차기 정부을 까는데 있어서 떳떴함을 위하여 ..
Commented by 플라피나 at 2007/12/19 09:34
경제학 콘서트였나.. 그 책에서도 이 딜레마를 다루고 있었죠 :(
그렇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편익을 무시한 채로는 역시 .. 신빙성이 떨어져요!
Commented by 주니깨비 at 2007/12/19 10:25
흠~ 엊그제 설에 놀러갔다가 그 분을 뵈었습니다. 조금만 의욕이 있었다면 악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참아버리고 사진만 찍었습니다. 나이는 많아보이시더군요. 역시 사진은 그전 걸 도로 쓰신건~^^

저도 투표는 했습니다. 제~발 5년 후에는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런다면 동남아시아쪽을 고려해 볼 것입니다.


저도 한 3천원주면 예비군훈련도 가는데 그까짓것 받아서 불우이웃돕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지만 고아원,양로원에 오는 사람이 예전보다도 없다고 합니다. 친구들이랑 이번에 모은 돈 가지고 꼭 어디든 가야겠습니다. 뭐 사진도 찍고 라면상자도 놓고 고식적인 일이라도 해야겠습니다.
Commented by michgan at 2007/12/19 12:32
지난번 대선 결과를 보고, 민주주의가 과연 최선의 제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물론 다른 의사 결정 과정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만, 지난번 결과를 보면 거의 49:51 정도였었죠. 민주주의로는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49%씩이나 만들게 되더군요.
Commented by monsa at 2007/12/19 19:32
우리 총재님 마이너 1등 못하셨군요.
메이저급 이인죄선수때문에 ㅋㅋ

Commented by 하얀까마귀 at 2007/12/19 21:07
leecheie / 네 그렇습니다.

monsa / 메이저의 벽은 높군요.

Ha-1 / 누나 가슴에 삼천원?

게드 / 그러니깐요.

플라피나 / 심리적인 편익이라면 어떤 걸까요? :)

주니깨비 / 그분의 용안을 뵈오면 팔자가 핀다는 전설이...

michgan /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할아버지라도 어쩔 수 없죠 사실.
Commented by archie at 2007/12/21 02:05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가 아니고 다만 최악을 피하기 위한 제도 아니었던가요?
Commented by 심리 at 2007/12/26 05:29
1개인으로 치면 한 표의 행사라는 게 별 거 아닌 거 같은데도, 그게 모이면 상황을 묘하게 변화시킵니다. 그러니 오묘하다는 것이지요. 히틀러도 민주적으로 뽑힌 사람이라면서요? 민주주의 더럽다 한심하다 비난해도, 결국 왕정이나 독재의 더러움보다는 나으니까요. 물론 앞으로 더욱 개선 발전시킬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해봅니다.
Commented by 하얀까마귀 at 2007/12/28 00:15
민주주의가 최악을 피했는지,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나은지도 사실 논란거리가 없는건 아니죠...
Commented by 몰캉몰캉 at 2008/01/03 14:22
뒤늦은 댓글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온라인이 거의 가가호호 퍼진 요즘 세상에는 좀 더 직접 민주정치에 가까운 형태로 정치가 바뀌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국회의원들의 매니페스토를 법제화한다면 좀 더 그럴싸한 사람들을 뽑을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덧붙여, 국회의원도 일정한 자격 시험을 거치면 어떨까 합니다. 결국 법안을 만들 사람들인데, 법을 집행할 사람은 시험을 보면서 만들 사람은 시험을 안 보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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